
현재의 아우슈비츠 박물관. 거대한 유리 진열장 너머에는 그들이 밟아야 했던 진흙의 흔적과 비명처럼 깊게 패인 상처,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누군가의 영혼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시공간을 훌쩍 건너뛴 풍경은 우리에게 이 압도적인 죽음에 대해 묻는다.
남편 '루돌프'는 조직에서 신망받는 장교이자 다정한 가장이고, 그의 아내 ‘헤트비히’는 담장 곁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을 가꾸며 완벽한 평온함을 느낀다. 햇살이 쏟아지는 수영장 주변을 뛰노는 아이들과 매끄러운 허리를 자랑하는 개들까지. 스크린을 채우는 풍경만 떼어놓고 본다면, 감히 누가 이 가족을 단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는 이 기괴할 정도로 완벽한 시각적 낙원 위로, 끔찍한 청각적 지옥을 무심하게 덧칠한다. 흐드러진 장미꽃 위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각장의 웅웅 거리는 기계음과 둔탁한 총소리, 누군가의 찢어지는 비명이 일상적인 백색소음처럼 내려앉는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우리는 그 가족의 뒷면을 마주한다.
흑백 반전의 열화상 시퀀스 안,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한 소녀가 분주히 움직인다. 수용소 노역자들이 지나갈 길목, 삽과 곡괭이가 꽂혀 있는 진흙더미 속에 소녀는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게 여러 개의 과일을 조심스레 묻어둔다. 들키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임무를 마치고 자전거를 끌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소녀의 작은 어깨 위로 깊은 안도감이 스며든다. 그 서늘하고도 따뜻한 온기를 지켜보며, 나는 2016년 세상을 떠난 폴란드 레지스탕스 소녀 알렉산드라에게 눈을 감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수십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 대량 학살 작전을 맡게 된 대가로, ‘루돌프’는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단란한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아내에게 기쁜 복귀 소식을 전하고 텅 빈 어스름한 긴 계단을 홀로 내려오던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선 채 속을 게워내듯 헛구역질을 토해낸다. 어둠 속을 응시하는 루돌프의 시선 끝으로, 영화는 현재의 아우슈비츠 박물관 풍경을 서늘하게 교차시키며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타인의 고통에 완벽하게 귀를 닫은 채, 오직 내 가족의 안위와 평온만을 쫓았던 그의 모습은, 지난 80여 년을 흘러온 너와 나의 모습이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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